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힌골 전투 (문단 편집) === 건차자도 사건(1937) === ||이 부분은 [[영어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Kanchazu_Island_incident|Kanchazu Island incident]],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https://ja.wikipedia.org/wiki/%E4%B9%BE%E5%B2%94%E5%AD%90%E5%B3%B6%E4%BA%8B%E4%BB%B6|乾岔子島事件(건차자도 사건)]], [[FC2]] [[블로그]] 중 [[http://holywar1941.web.fc2.com/kindai-kokkyo12.html|만주국-소련 국경 분쟁에 관해 포스팅한 블로그(일본어)]], [[http://forum.axishistory.com/viewtopic.php?t=91837|Axis History Forum]],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의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했습니다.|| [[파일:external/www.pro-classic.com/lys_II48.jpg]] ▲ 건차자도 사건을 설명한 지도. 지도에 표시된 강은 흑룡강, 즉 [[아무르 강]]이다. 강에 떠 있는 3개의 방추형 물체는 [[소련 해군]] [[건보트]], 하중도 중에서 검은색 점 같은게 찍혀있는 2번째 섬은 소련군이 상륙한 지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건차자도 사건은 1937년 6월 19일부터 동년 7월 4일까지 벌어졌던 소규모 국경분쟁으로, 교전 및 피해 규모는 적지만 사건의 발발 시기가 한창 2차 대전의 전운이 고조되던 때였던 데다가 이후 소련과 관동군의 행보를 정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중요성이 높다. 건차자도(乾岔子島/Kanchatzu Island)[* 항목 최상단 표의 첫 번째 지도에서 '건분지'로 표시되어 있는 곳.]는 중국 아이후이 구(愛輝區) 동남쪽 100km 지점에 있는 [[아무르 강]][* 32년 뒤인 1969년 이곳에서는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벌어진다.]의 [[하중도]]로서, 만주와 소련의 공식 국경선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볼쇼이 우수리스키 섬(Bolshoy Ussuriysky Island/Острова Большой Уссуриский)이라고 했다(줄여서 우수리스키 섬). 당시는 1858년 [[아편전쟁]] 도중 체결한 [[불평등조약]]인 [[아이훈 조약]],[* [[러시아 제국]]과 체결했던 평등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은 것이었다.] 전쟁 후인 1860년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아무르 강 이북 지역과 [[연해주]]가 모두 [[러시아]]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즉 엄밀히 말하면 아무르 강 내에 있는 하중도인 건차자도도 [[러시아 제국]]의 후예인 소련의 영토였던 것. 그러나 만주국은 자기네 배가 다니는 항로가 아무르 강이라며 [[국제법]]을 내세워 건차자도의 영유권을 주장했고 소련은 당연히 아이훈 조약을 들먹이며 영유권 확보에 나섰다. 이 당시 건차자도에는 만주국에서 보낸 사람들이 거주 중이었다. 분쟁이 벌어진 배경을 좀 더 상세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아이훈 조약, 베이징 조약으로 국경을 정한 것은 조약 체결 당시 아무르 강의 수로 위치에 따라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약이 체결된 1858, 1860년에서 70여 년이 지난 상황이었으므로 폭우, 홍수 등 자연적 요인으로 인해 지형이 그 당시와 다르게 바뀌어 있던 것이 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원래 조약에서 아무르 강의 주요 수로를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한 섬은 러시아 소유, 남쪽에 위치한 섬은 중국의 소유로 규정해 놓았는데 1930년대가 되자 수로의 위치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건차자도는 조약 체결 당시 아무르 강의 수로 북쪽에 있어 본래 러시아 소유였으나 이때 수로가 섬 북쪽으로 흐르게 되어 수로의 남쪽에 위치하게 된 건차자도는 중국, 즉 만주국 소유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당시에는 건차자도 말고도 여러 곳에서 이와 유사한 국경 획정 문제가 야기되었는데 건차자도는 그 중 가장 큰 섬이었다. 소련은 조약 체결 당시의 상황이 중요하며 수로의 위치 변동은 일시적인 것으로 섬의 소유권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주장했고 만주국은 현재의 상황을 조약의 내용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며 맞섰다. 1937년 6월 19일, 2척의 소련군 건보트가 강 중앙선을 넘어 건차자도에 접근해 소련군 병사 20명을 상륙시켜 섬에 살던 만주국 공무원 등 거주민들을 내쫓고 노동자를 납치했으며 강을 지나던 만주국 소속 선박을 위협하였다. 다음날인 6월 20일, 만주국 경찰이 소련군의 월경 행위를 조사하다가 소련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기도 했다. 조사 결과 이미 40명의 소련군이 건차자도를 요새화하고 있었다. 만주국 외교부는 소련 측에 계속 항의했으나 소련에서는 6월 28일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이에 우에다 겐키치 관동군 총사령관은 관동군 참모본부의 동의를 얻어 관동군 제1사단을 아무르 강 인근에 파견했다.[* 관동군 제1사단에는 일본 본토에서 [[2.26 사건]]을 일으키고 만주로 쫓겨나다시피 파견된 장교들이 다수 있었는데 이들은 강한 반공 성향을 띠고 있었고 이런 성향 때문에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매우 공세적인 태도로 나왔다고 한다.] 관동군 제1사단은 이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는 6월 29일 야습을 감행하기로 했으나, 관동군 참모본부에서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계획이 지연되었고, 같은 날 소련도 건차자도에서의 철군에 동의했다. 그러나 6월 30일 아침 소련군 건보트 3척[* 함급은 BKA 프로젝트 1124형이라고 한다.]이 선제 공격을 해오자[* '소련군 건보트가 선제 공격을 했다'는 서술은 일본어 위키페디아 항목과 FC2 블로그에 있는 내용이다. 영어 위키백과에는 "On the morning of June 30, soldiers from the 49th Regiment led by Col. Mihara attacked the Soviets using two horse-drawn 37mm artillery pieces(6월 30일 아침, 가나에 미하라 중좌 휘하 관동군 1사단 제49연대는 말이 끄는 37mm 대포로 소련군을 공격했다)"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건차자도 사건에 대한 정보가 한국어 웹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고, 일본어나 영어로도 자료가 풍부하게 나오지 않아 진위 검증이 어렵다.] 가나에 미하라 중좌가 지휘하는 1사단 제49연대는 37mm 포로 응사했다. 관동군은 포상을 급조해서 [[고폭탄]], [[철갑탄]]을 사용해 소련군 건보트에 포격을 퍼부었다. 이 포격으로 건보트 1척이 침몰하고[* 동년 10월 22일-29일 사이에 인양된 것으로 추정된다.] 1척은 파손되었다. 소련군 사망자는 37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일본군 사망자는 없었다. 침몰한 건보트에 타고 있던 소련군이 강에 빠져 강둑으로 도망칠 때 일본군이 [[기관총]] 난사를 퍼부으면서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이때 이미 시게미츠 마모루 일본 대사와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 사이에 [[뉴올리언스 전투|이미 정전 협정이 결정되었는데 관동군이 해당 전보를 수신하지 못해 양 군 간에 교전이 일어나버린 것이다.]] 시게미츠 대사는 소련 측의 선제 공격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고 7월 4일 소련군은 건차자도에서 철군했다. 관동군은 얼씨구나 하며 건차자도를 점거했고 이후 건보트 7척이 더 접근해 왔지만 관동군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1941년부터는 소련도 건차자도를 내버려두었다. 그 이유는 바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이러한 명백한 도발 행위에 더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강하게 불어닥치던 [[대숙청]]의 피바람 때문에 소련군이 일본군을 압살할 것이란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소련군이 철수한지 3일 뒤인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소련 정보부에서는 [[중화민국/국민정부|중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 예측하여 추가적인 보복을 가하지 않으면 일본이 중국 전선으로 눈을 돌릴 것이라 생각하고 교전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막심 리트비노프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 레옹 블룸(Leon Blum)에게 "소련은 중일전쟁의 발발에 긍정적인 반응이며 '''전쟁이 최대한 장기화되길 바란다'''"고 얘기한 바 있다. 일본을 중국 대륙에 오래 잡아 놓을수록 극동에서의 위협이 약화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출처: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 이윽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소련의 예측대로 관동군은 건차자도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저 형식상으로 만주국이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동군은 소련군이 쫄아서 반격하지 못한 것이라 단단히 착각했고 관동군 참모 [[츠지 마사노부]]는 향후 일어날 소-일 간 전투에서 "우리의 자랑스런 병사들이 중앙의 명령 때문에 반격을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심지어 주중 미국 대사마저도 소련의 군사력이 약해서 반격을 못한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2차 대전 종전 후 건차자도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아마도 [[만주 작전]] 때 소련군에게 점령된 것으로 추측된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해당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가 남아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0707002092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7-07-07&officeId=00020&pageNo=1&printNo=5695&publishType=00020|링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